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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의 나비 꿈29

안개를 만나다 안개를 만나다 배용주 할머닌 강둑에 앉아 지난겨울 적벽에 두고 온 아범 찾으며 그분이 오셨다고 한다 옷고름 늘어뜨린 채 염재를 넘을 거라 중얼거리신다 정오가 되도록 적벽은 안개옷을 벗지 못하고 빛을 껴안던 강물도 제 낯을 잃은 채 뒤엉킨 속만 꿀렁거린다 산 그늘 길어지고 별님도 오지 않는 밤이오면 누군가 어둠 속에서 강 비늘 세우는 소리 먹장을 벗어난 초승달이 적정산 절벽 위로 기우뚱 걸렸다 노을에 홍시는 익어가고 강물이 숨결을 고르면 우리는 억세 꽃 같은 방우리에서 안개를 만나고 있다 2023. 11. 27.
그녀들의 봄 그녀들의 봄 배용주 그녀는 오일장 번잡한 골목 폭설에 기운 담 밑에서 굼벵이처럼 움츠려 졸고 있다 곱은 손 은가락지 훈장처럼 빛나고 뒷산 밭 논두렁에서 뜯은 봄동들 ‘축개업국보약국’표 보자기 위에 밥상처럼 펼쳐놓았다 새벽 그늘 깊은 광주리에 냉이 달래, 봄나물 내오고 뻐근한 뼈마디 도닥거리며 개구리처럼 와글와글 쏘아보는 곱지 않은 눈초리에도 머리 흔들어 외면하는 뒤통수가 따가워도 진달래 꽃물처럼 파랑새 가슴처럼 소녀 같은 그녀의 손 가볍다 하필, 봄만 되면 오일장을 찾는 것인지 2023. 11. 27.
지루한 의자 지루한 의자 배용주 부산교통 영화여객 하덕정류소 처마밑에 할아버지 의자에 앉으셨다 먼눈으로 젖은 길 바라보시다 금세 그래그래 한 시절이여, 한 시절 고개를 끄덕이신다 태우시던 담배는 자글거린 입술을 떠나 바닥에 뒹굴고 간간이 오랜 기침을 쏟아 내며 쓴 잇몸만 중얼거리신다 다른 의자에 검정비닐봉지 얹히시고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신다 한여름을 등에 지고 모로 누운 평상같이, 대전발 영시 오십 분 노랫소리 들으며 빛바랜 털신 코에 비 들이친다 2023. 11. 27.
세상 속에서 세상 속에서 배용주 나는, 얼마나 많은 씨앗을 뿌렸던가 얼마나 많은 새싹을 뽑아 잎사귈 길러냈던가 많은 꽃을 피워 열매를 거두는 꿈을 꾸었던가, 나는 나는, 꿈을 꾸며 끈질기고도 욕심 많은 창 너머 어둔 하늘을 본다 기쁜 그날들을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 흔한 사랑을 하고 가슴 아픔 날들을, 그날들을 잊길 꿈꾸겠는가, 나는 그러더라도, 사랑치 않고 사랑치 않고도 내 가슴이 불꽃을, 꽃눈들을, 키워 내기를. 또 얼마나 바람부는 언덕을 서성여야 하는가 2023. 11. 27.
이쑤시개 이쑤시개 배용주 너를 보면 나는 우울해 어디가 머리이고 어디가 발바닥인지 좀처럼 구분되지 않아 먼저 잡힌 쪽이 머리라 고집하며 가슴과 허리 깨 종아리와 허벅지 깨 그 어느 부위도 우울함 투성인 생의 점자들이 미세하게 읽히는 피 한방울까지 다 쏟아낸 힘줄들이 우우우우 피리소리로 달려드는 너를 보면 우울해 언젠가 식도처럼 좁은 읍내 시냇가 호박꼭지처럼 굽은 장터 골목에서도 훤히 내다 뵈는 나무 파릇한 이파리들 휘날림 속에서 매미가 한여름 청춘가를 불러대던 그 나무 어느 부근 살집인지 어느 부근 내장인지 짐작조차 못 할 너를 보면 문득 살아난 기억의 애벌레들이 날아오르곤 해 최소한 네게도 비장한 꿈이 있었겠지만 도끼가 창공을 서슴없이 지나기 전에는 아니, 일 획이 그어진 민족이기 전에는 아니, 굴욕의 침략을 .. 2023. 11. 27.
백련지에서 백련지에서 배용주 꽃 다 진 백련지에서 연잎 머리 조아리고 있다 얼어붙은 물밑에서 누군가와의 입맞춤인지 포리뤼 박새 날아와 앉으니 그 모습 하도 위태로워라 가냘픈 허리를 밟아도 부서지지도 주저앉지 않는 저 굽은 허리 속이 궁금하다 굽으면서까지 가두었던 얼음 뼈들 뽀득거린다 꽃피고 새 울면 허물어질 아치 뼈 이마가 무릎에 닿도록 내통하는 잠망경들 보인다 눈은 그치지 않고 나는 길을 잃었다 고치처럼 방 한 칸 빌려 살며 가슴속 청진기로 봄 익는 소리 듣는다 2023. 1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