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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의 나비 꿈29

엄니의 갯길 / 배용주 엄니의 갯길 배용주 울 엄니 걸어가신다 갯바람에 멍든 동백은 붉게 지는데 몸뻬 입고 광주리 들고서 가신다 갯마당 풀숲 위 풀꽃들 퍼질러 피고 댓잎 부리에 산새들 꽃잎 먹고 절창인데 솔섬 위로 떠 오른 앳된 별들도 동백숲 갯바람은 하염없이 성글거리는데 마늘밭 푸른 길 생긋한 보리밭 길 따라 노루목 갯벌로 물질 가신 울 엄니 이제나 보드랍게 봄 치마 펼치고 앉아 진등에 촛불 하나 밝히시려나 솟대쟁이 봄바람에 날창날창 춤추면 둠벙샘에 살구 꽃물 번지듯 울 엄니 날숨도 샐빛처럼 풀리실까 바람결에 냉이꽃 피워대던 갯길 눈발 성한 새벽 김발 같은 머리 풀고 갯길로 떠난 무녀도 풀빛 따라오는데 2023. 11. 30.
읍장 할머니 읍장 할머니 배용주 추섬이 내다뵈는 골목 끝 하루에도 몇 번씩 설익은 감처럼 떨떠름하게 만나던 새댁 칠순 넘도록 마주한 인연이니 사돈이라 하신다 꽃무늬 전대 허리에 차고 한 평 남짓 좌판 위에 쭈끼미문애낙자쏙새비해삼전복꼬막홍합바지락 조기맹태까재미고등애준치삼치꽁치갈치멜따구 믹과 다시마, 청각, 메생이 말린 가오리 몇과 청태 섞인 해우 두 톳 뀌미처럼 올려두고 가슬엔 전에가 제격이재 웜메웜메, 물 좋은 거 참말로 좋다야 갯것은 생물이 최고여 애창곡처럼 되네 인다 읍장에서 큰 애 낳고 아들 장가 다 보낸 읍장 할머닌 신찬한 삭신 추스르며 할아버지 먼 길 보내시고 개댁이 생선 하나 물고가도 입가에 함박꽃 피우신다 어머니, 이제 그만하세오 아들 내외 당부도 마다하고 눈발 고운 아침 뜨신 커피 마시며 완도읍장 짠물.. 2023. 11. 30.
회룡포 연분홍 치마 회룡포 연분홍 치마 배용주 물이 든다 연분홍 치마에 펄 물이 든다 아른거리는 주름살 같던 개펄 사이로 거리낌도 없이 하루 두 번 배꼽까지 차오르는 반가운 손 얘기 똥 유채꽃이 깜깜한 앞날에 길이 되어버린 배고픈 하루를 치자 빛깔로 물들이며 낯 알 같은 자식과 통할 때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신 이에게 감사했었지 귓속에 종소리가 삶을 채울 때도 있었고 가마솥 하늘 열고 무릎 꿇는 날도 있었지만 이제 그 붉던 피 모두 지워지고 오랜 기침 한숨만 이어갔었는데 오늘은 뒷마당에 여린 꽃들이 많이도 피었어 하룻밤이 지났을 뿐인데 연보랏빛 꽃잎을 열고 환하게도 반기고 있어 반갑기도 하지 잊지도 않고 찾아와 바람의 음표 하나씩 달고 있으니 볕 좋고 바람도 잠잠한 날 갯가서 낙지라도 잡아야겠어 바람에 휘날리는 연분홍 치마는.. 2023. 11. 30.
나목처럼 나목처럼 배용주 단숨에 쓰러져도 좋을 일이다 내 살아 물길 찾는 여린 솜털 풀꽃 하나 바람막이 되었다면 달팽이 같은 느린 꿈꾸며 시원한 그늘 한 점 기울이고 착한 이 서넛 좋은 추억 하나 되었다면 싹이나, 꽃 하나 못 피어도 내 죽어 어느 산골 아궁이 쩔쩔 끓는 아랫목이 되리라 그러지도 못한다면 식솔 많은 개미나 만삭둥이 거미에게 방 하나 내어주면 될 일 나 하나쯤 단숨에 쓰러져 썩어들며 머리 한쪽 잃은 버섯 몇 키워도 좋을 일 2023. 11. 30.
지순한동행 지순한동행 배용주 그대 곁에서, 걸음을 맞추렵니다 빠르면 빠르게 느긋하면 느긋하게 한걸음 뒤에서 걸으렵니다 때로는 비바람치대도 묵묵히 곁을 지키다 보면 맑은 하늘도 보겠지 그대 곁을 떠날 수 없는 지지 않는 향기로 물들어 내 생의 지순한 사랑은 죽지 않는 불씨로 타올라 그대 삶에 미소가 되는 환한 봄날도 오겠지 포근히 팔을 맞잡다 보면 그대 어깨 가벼워지고 영영 곁에서 바라봅니다 하늘 보면 노을에 젖고 꽃 보면 꽃잎 되어 시선을 맞추렵니다 그대 곁에서, 2023. 11. 30.
꼭짓점 꼭짓점 배용주 아찔한 감나무 가지 끝 빈약하게 달린 꼭지 하나 햇살을 기억하고 바람에 몸을 굽히는 어머니 같은 얼굴 꽃 지고 열매 거두어도 끝까지 푸를 이름 세상 모든 꽃이 피고 지도록 놓을 수 없는 고집 생의 희로애락 맞닿은 꼭짓점 밥 한 공기 마지막까지 공손하게 드리고 싶어 빈약한 꼭지 위로 무수한 점 찍는다 2023. 1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