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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의 나비 꿈29

지문 지문 배용주 처음 남자가 손끝마다 젖은 언덕을 새긴 후로 여자의 후손은 아픈 뒤 발꿈치를 기억하며 원죄에 돌멩이를 던졌으리라 잊힌 유언들이 빗장을 부수고 육중한 겨울짐승에게 꽂힌다 생존의 창살이 팽팽한 문풍지에 꽃을 피운다 초록 그림자에 숨은 짐승의 머리카락이 갈라지고 선명해지면 질수록 손끝 밭고랑에도 윤기가 돈다 목마른 경계심이 만든 길 발아래 찰랑 상한 뒤꿈치의 안식이 역겨워 돌팔매질한다 팽팽해진 살 속에 숨겼던 문장 물 위에 테두리를 만들고 지문보다 선명한 물의 산맥이 솟구친다 어느 우주의 은하이던가 별의 산맥 바다의 파도 저수지의 돌멩이가 용감히 뛰어들어 소용돌이로 굳었던 동산 수많은 하늘의 암호들이 짐승의 동공 위로 떨어진다 내 엄지 밭고랑에도 물살이 세차다 2023. 11. 27.
공중에 달린 집 공중에 달린 집 배용주 볕 좋은 빈터에 목련꽃이 피었다 실금같이 갈라진 하늘에 겨울의 물꼬를 트고 가장자리부터 촛대전구 한 알씩 불 밝혔다 그 모습 하도 예뻐 손 그림자 비둘기 날갯짓을 기억하듯이 거꾸로 매달려 불 밝히던 백열등을 추억하다가 사십 년 전 기억처럼 나도 호롱에 성냥불을 댕긴다 종일토록 젖어 흐르던 하늘이 저녁에야 햇살 퍼지듯 환한 창문을 닫는다 동산 정수리 위에 백열등 하나 켜둔 채 새들이 날아간 쪽으로 이불 깔고 눕는다 마치, 그때같이 얼굴 붉도록 눈 비비며 나는 가슴 시린 꽃불을 피운다 끝자리마다 꽃 그림을 그려댄다 대문도 환하게 열어둔 집 이마를 들이밀고 피워댄 꽃집 손 모으고 기도하던 꽃잎들 어깨를 들썩이며 하얀 날갯짓으로 척척 내린다 촛대전구 한 알씩 깨져만 가고 덩그러니 필라멘트.. 2023. 11. 27.
해운대 밤바다를 쓰다 해운대 밤바다를 쓰다 배용주 어지럽던 날들을 나 홀로 떠나 드넓은 바다를 읽는다 몇 해 전 쓰나미가 덮쳤다던 해운대 저마다 한 잎 이야기를 달고 푸들 대며 달려와 갯고둥 같이 어물거린다 아무것도 뵈지 않은 해변 물컹하게 무너지고 다시, 새살 돋듯 살아난 파도 내 발밑에서 무너지길 수차례 나의 절름발이 날들은 스스로 마비된 가오리처럼 푸른 상처를 어루만지며 의로운 한 소절 노래를 부른다 너의 젊은 날도 울렁이는 파도 같이 소독솜 꾹국 찍어 하얗게 갈기를 세운다 지칠 줄 모르는 심해의 몸짓 파도의 칼을 견뎌낸 것들이 상한 데 없이 읽어주듯이 너에게 편지를 쓴다 내 속에서 심해의 숨소리 펄떡거린다 2023. 11. 27.
뜨거운 침묵 뜨거운 침묵 배용주 살아라 죽기까지 촛불을 켜라 껍데기뿐인 나는 죽고 소년 같은 불꽃이 되라 때로는 침묵이 외침보다 크다 이제 우리 알기에 거짓된 혀로 청청한 깃발을 매달지 말라 숨 쉬는 이여 발마다 자국마다 애끓는 사랑으로 촛불을 켜다오 달맞이꽃 달과 함께 지고 담쟁이 푸른 벽을 넘듯이 눈빛에 새긴 노래 목청껏 깃대 높게 흔들라 아이야, 촛불을 밝힌다 앉아 울던 소년아 입마다 뜨겁게 내일을 살아라 2023. 11. 27.
쉼표를 찍으며 쉼표를 찍으며 배용주 쇠죽 끓이던 아버지 콧노래 할 때 두 다리 사이 출렁이던 백열등 빛 곤두박질칠 때 해산한 어미 뜨끈한 속살 꺼내어 이마를 핥을 때 얼마나 많은 별이 떨어졌을까 게으른 아침 햇볕 몽롱한 감기약처럼 일어설 때 치밀어 오른 새싹 흔들리는 하늘 밀어 내릴 때 깡으로 그리는 흐릿한 밑그림 위로 속살이 지날 때 또 얼마나 많은 별을 세어봤을까 쉼표를 찍으며 두 다리 세울 때 불어터진 젖통 찾아 끈질기게 가난한 배 채울 때 내 어머니 곰탕 끓여 아침을 나르실 때 그러는 동안 얼마나 많은 해는 허공으로 사라졌을까 2023. 1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