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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의 나비 꿈29

바람의 무게 바람의 무게 배용주 굽은 허리로 어머니, 밭고랑에 앉아 수수의 마지막 열병식을 바라보고 있다 바람의 무게로 휘어 질대로 휘어진 저 겸손함이 끝내 온몸에 핏발 서게 했을 것이다 어머니 허리같이 뒷산 능선도 노을에 휘고 수수밭 건너 실개천도 휘고 가을 한낮 수수모가지도 휘고 휜다 어머니, 기역자로 휘어진 낫을 들고 바람의 무게를 꺾는다 수수의 겸손이 자존심으로 살아난 순간이다 2023. 11. 30.
꼭지 꼭지 배용주 저들은 힘이 세다 세상 꽃들과 열매들의 젖줄이다 꽃이 지고 열매 시들어도 끝까지 푸르른 고집으로 햇살을 기억하고 몸으로 바람을 읽어간다 들숨 같고 밥줄 같은 마지막까지 달고 사는 어머니 2023. 11. 30.
거인(巨人) 거인(巨人) 배용주 시한 내내 묻어둔 고구마 삶던 긴긴날들을 막연한 기다림으로 그리움만 키우시고 계셨나 보다 부산한 아침 뒤로 백년손처럼 찾는 무심한 내욀 기다리며 긴긴 기다림 끝 문풍지 같은 한숨소리 쌓여가던 사월 아랫목 등지고 누워 잔설 녹이던 가슴에 물소리가 난다 속도 모른 꽃 바람에 신나락이 트고, 앵두꽃이 피고, 개구리알이 깨어도 군불 지피는 심정을 누가 알까 몰라 고단한 낙수 소리 낮게 감추며 길목부터 반겨 달려든 발자국 무겁던 객지의 껍질을 털고 따순 햇살 같은 안식을 찾던 날 까칠한 볼에 유채꽃이 핀다 어머니, 멍한 가슴에 꽃물이 들어 지긋지긋한 기다림 길어진들 한결같은 그 사랑 어디다 견줄까, 그 큰 순한 사랑을 2023. 11. 30.
난독 난독 배용주 나무의 문자를 읽는다 듣도 보지도 못한 문자를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양갱같이 말랑한 바람의 전위예술을 읽어간다 가지의 빈틈에 콧날이 서고 헝클어진 풀꽃은 눈꽃처럼 피는데 이 길은 어느 낭만파 시인이 걷던 길인가 날 좋은 봄날 허무맹랑한 자음과 겨드랑이에 숨겨뒀던 낯선 모음 행간에 눈, 물, 쏟아져 허벅지까지 차오르면 꽃눈과 잎눈 사이 색색으로 읽혀간 흔적 새떼는 내 배내옷 한입 물고 날아가고 경지에 이른 칼날은 허공에서 빛날 때 그들의 단어를 단칼에 떼어낸 나는 책 속에서 말라버린 푸른 문자를 읽어간다 2023. 11. 27.
계단 계단 배용주 할머니 올라가신다 지팡이도오른다 지팡이가한단오르면 할머니도한단따라오르고 오르고오르다힘이들면할머니 계단턱에앉아오르던길바라보신다 골목화분은넘어지고깨지고찌그러졌고 비에젖은목련가지도아무도몰래담을넘었다 할머니 내려오신다 지팡이앞세우고 가다말고내려오신다 담위에턱고인목련꽃가지 봄노래부르는그모습절창이라 밤마다아기별뛰어놀던가로등아래 발그레한진달래처럼미소지으신할머니 수십계단아래경쾌하게굴러떨어진깡통하나 2023. 11. 27.
살며 뒤돌아서서 살며 뒤돌아서서 배용주 산다는 것은 가슴속에 탑 한단 올리는 거라네 한단 두단, 모양은 달라도 늘 세상 쪽으로 기울거나 욕심으로 쏟아지기도 하는 그때마다 쉼표 하나 품는 거라네 가슴 아파 힘들어도 질끈, 눈감고 울다가 바보처럼 웃어버리기도 하는 그때마다 불씨 하나 품는 거라네 살아간다는 것은 수다쟁이 헛소문이 아닌 탑 머리에 돌꽃 하나 피우는 거라네 2023. 1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