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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열(發熱) / 배용주 발열(發熱) 배용주 연거푸 같은 꿈을 꾸었다 벌건 산불이 휩쓸고 간 솔숲은 거뭇했고 숲길은 어둡고 캄캄해서 밤마다 눈을 감고 걷다 보면 몸에서는 뜨겁게 열꽃이 피었다 어머니는 연기 속을 걸어 나와 누나에게 붕어빵 머리를 내겐 몸통을 떼어주었다 어머니는 손톱만 한 꼬리를 오물거리며 맛나다 징하게 맛나다 하셨다 머리 잘린 붕어빵의 눈에서 앙금 같은 눈물이 뚝뚝 흘렀다 떨어진 눈물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랐다 하루살이가 캄캄해서 눈을 감았다 남들은 내게 갱년기라 했다 괜히 혼자 걷고 싶고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고 첼로 소리에 젖어 종일 봄을 그리며 연푸른 나뭇잎을 바라보고 싶었다 밤이면 열이 올라 잠옷도 벗은 채로 이불을 걷어차고 러닝셔츠를 가슴까지 올리고서야 잠이 들었다 아들은 밤 열 시가 넘어 왼 가슴에 카네.. 2023. 12. 2.
가시울 / 배용주 가시울 배용주 열두 살 아들이 빨간 플라스틱 의자에 올라 간신히 별 무리를 달아놓았다 별들은 흐트러지지 않는 간격을 유지하며 내 머리 위에서 반짝거리고 불면의 밤하늘에 낱장을 넘기며 천장에 달린 별자리를 얘깃거리 삼아 딸아이에게 읽어주곤 했다 양떼목장 가장자리에 울타리를 거꾸로 세운다 양들이 가시울을 넘었다 끝없이 뛰어 넘는 양들을 세며 나는 동화 속 양치기 소년을 생각하는데 아들은 금세 던져놓은 탱탱볼 마냥 어디로 튈지 모를 사춘기 발자국을 찍으며 가벼운 하늘을 이고 그르렁거리며 늑대처럼 잠이 들었다 이 밤도 강마른 양 무리 가시울을 넘는데 나는 먼 우주 어느 별에서 하이얀 찔레 넝쿨을 찾는 것인지 2023. 12. 2.
파편 / 배용주 파편 배용주 쨍그랑, 뭔가 깨졌다 병이 깨졌다 병, 꽃이 깨졌다 꽃, 잎이 깨졌다 잎, 물이 깨졌다 물, 병이 산산이 깨졌다 꽃잎과 물병이 깨져 아들의 발가락 옆 꽃물 들었다 다칠까, 내 아내 가슴이 깨진다 2023. 12. 2.
엄니의 갯길 / 배용주 엄니의 갯길 배용주 울 엄니 걸어가신다 갯바람에 멍든 동백은 붉게 지는데 몸뻬 입고 광주리 들고서 가신다 갯마당 풀숲 위 풀꽃들 퍼질러 피고 댓잎 부리에 산새들 꽃잎 먹고 절창인데 솔섬 위로 떠 오른 앳된 별들도 동백숲 갯바람은 하염없이 성글거리는데 마늘밭 푸른 길 생긋한 보리밭 길 따라 노루목 갯벌로 물질 가신 울 엄니 이제나 보드랍게 봄 치마 펼치고 앉아 진등에 촛불 하나 밝히시려나 솟대쟁이 봄바람에 날창날창 춤추면 둠벙샘에 살구 꽃물 번지듯 울 엄니 날숨도 샐빛처럼 풀리실까 바람결에 냉이꽃 피워대던 갯길 눈발 성한 새벽 김발 같은 머리 풀고 갯길로 떠난 무녀도 풀빛 따라오는데 2023. 11. 30.
읍장 할머니 읍장 할머니 배용주 추섬이 내다뵈는 골목 끝 하루에도 몇 번씩 설익은 감처럼 떨떠름하게 만나던 새댁 칠순 넘도록 마주한 인연이니 사돈이라 하신다 꽃무늬 전대 허리에 차고 한 평 남짓 좌판 위에 쭈끼미문애낙자쏙새비해삼전복꼬막홍합바지락 조기맹태까재미고등애준치삼치꽁치갈치멜따구 믹과 다시마, 청각, 메생이 말린 가오리 몇과 청태 섞인 해우 두 톳 뀌미처럼 올려두고 가슬엔 전에가 제격이재 웜메웜메, 물 좋은 거 참말로 좋다야 갯것은 생물이 최고여 애창곡처럼 되네 인다 읍장에서 큰 애 낳고 아들 장가 다 보낸 읍장 할머닌 신찬한 삭신 추스르며 할아버지 먼 길 보내시고 개댁이 생선 하나 물고가도 입가에 함박꽃 피우신다 어머니, 이제 그만하세오 아들 내외 당부도 마다하고 눈발 고운 아침 뜨신 커피 마시며 완도읍장 짠물.. 2023. 11. 30.
회룡포 연분홍 치마 회룡포 연분홍 치마 배용주 물이 든다 연분홍 치마에 펄 물이 든다 아른거리는 주름살 같던 개펄 사이로 거리낌도 없이 하루 두 번 배꼽까지 차오르는 반가운 손 얘기 똥 유채꽃이 깜깜한 앞날에 길이 되어버린 배고픈 하루를 치자 빛깔로 물들이며 낯 알 같은 자식과 통할 때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신 이에게 감사했었지 귓속에 종소리가 삶을 채울 때도 있었고 가마솥 하늘 열고 무릎 꿇는 날도 있었지만 이제 그 붉던 피 모두 지워지고 오랜 기침 한숨만 이어갔었는데 오늘은 뒷마당에 여린 꽃들이 많이도 피었어 하룻밤이 지났을 뿐인데 연보랏빛 꽃잎을 열고 환하게도 반기고 있어 반갑기도 하지 잊지도 않고 찾아와 바람의 음표 하나씩 달고 있으니 볕 좋고 바람도 잠잠한 날 갯가서 낙지라도 잡아야겠어 바람에 휘날리는 연분홍 치마는.. 2023. 1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