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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의 꽃 어머님의 꽃 배용주 어머니! 꽃이 피었어요. 어머니는 장독을 닦으시다 나비처럼 웃으셨다. 정월 초하루 낮은 단감나무 가지 아래 텃밭은 홍시빛이다. 주름진 가슴으로 겨울을 버텨 온 꽃 가슴이 아린다. 겨우내 말리신 어머님을 닮은 백일홍이 제목이 지워진 낡은 책 사이사이에 꽃을 피웠다. 2023. 11. 30.
꼭지의 힘 꼭지의 힘 배용주 어머니 호박을 들어낸다 굽은 허리로 보리밭둑에 앉아 햇살을 깔고 앉은 호박 하나 들어낸다 굽을 데로 굽은 마른 꼭지 햇살의 힘이 저들을 키워내려고 온 힘으로 꼭지를 굽혔을까 여린 잎 하나 틔우려고 꼭지가 돌도록 용 쓴 탯줄 그늘진 아랫목에 풀꽃 똬리 틀어 놓았다 아랫목에 햇살 깔고 앉은 저 호박 볕 드는 쪽으로 굽은 꼭지의 반대편 밥풀만 한 꽃잎 훈장처럼 배꼽에 달았다 2023. 11. 30.
개펄 개펄 배용주 저건 발자국이다 아니 시퍼런 회초리다 수천의 손을 짚고 두 발 질질 끌고간 앞치마 어머니 조금든 날 묵직한 저녁 캐오신다 2023. 11. 30.
바람의 무게 바람의 무게 배용주 굽은 허리로 어머니, 밭고랑에 앉아 수수의 마지막 열병식을 바라보고 있다 바람의 무게로 휘어 질대로 휘어진 저 겸손함이 끝내 온몸에 핏발 서게 했을 것이다 어머니 허리같이 뒷산 능선도 노을에 휘고 수수밭 건너 실개천도 휘고 가을 한낮 수수모가지도 휘고 휜다 어머니, 기역자로 휘어진 낫을 들고 바람의 무게를 꺾는다 수수의 겸손이 자존심으로 살아난 순간이다 2023. 11. 30.
꼭지 꼭지 배용주 저들은 힘이 세다 세상 꽃들과 열매들의 젖줄이다 꽃이 지고 열매 시들어도 끝까지 푸르른 고집으로 햇살을 기억하고 몸으로 바람을 읽어간다 들숨 같고 밥줄 같은 마지막까지 달고 사는 어머니 2023. 11. 30.
거인(巨人) 거인(巨人) 배용주 시한 내내 묻어둔 고구마 삶던 긴긴날들을 막연한 기다림으로 그리움만 키우시고 계셨나 보다 부산한 아침 뒤로 백년손처럼 찾는 무심한 내욀 기다리며 긴긴 기다림 끝 문풍지 같은 한숨소리 쌓여가던 사월 아랫목 등지고 누워 잔설 녹이던 가슴에 물소리가 난다 속도 모른 꽃 바람에 신나락이 트고, 앵두꽃이 피고, 개구리알이 깨어도 군불 지피는 심정을 누가 알까 몰라 고단한 낙수 소리 낮게 감추며 길목부터 반겨 달려든 발자국 무겁던 객지의 껍질을 털고 따순 햇살 같은 안식을 찾던 날 까칠한 볼에 유채꽃이 핀다 어머니, 멍한 가슴에 꽃물이 들어 지긋지긋한 기다림 길어진들 한결같은 그 사랑 어디다 견줄까, 그 큰 순한 사랑을 2023. 1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