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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독 난독 배용주 나무의 문자를 읽는다 듣도 보지도 못한 문자를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양갱같이 말랑한 바람의 전위예술을 읽어간다 가지의 빈틈에 콧날이 서고 헝클어진 풀꽃은 눈꽃처럼 피는데 이 길은 어느 낭만파 시인이 걷던 길인가 날 좋은 봄날 허무맹랑한 자음과 겨드랑이에 숨겨뒀던 낯선 모음 행간에 눈, 물, 쏟아져 허벅지까지 차오르면 꽃눈과 잎눈 사이 색색으로 읽혀간 흔적 새떼는 내 배내옷 한입 물고 날아가고 경지에 이른 칼날은 허공에서 빛날 때 그들의 단어를 단칼에 떼어낸 나는 책 속에서 말라버린 푸른 문자를 읽어간다 2023. 11. 27.
계단 계단 배용주 할머니 올라가신다 지팡이도오른다 지팡이가한단오르면 할머니도한단따라오르고 오르고오르다힘이들면할머니 계단턱에앉아오르던길바라보신다 골목화분은넘어지고깨지고찌그러졌고 비에젖은목련가지도아무도몰래담을넘었다 할머니 내려오신다 지팡이앞세우고 가다말고내려오신다 담위에턱고인목련꽃가지 봄노래부르는그모습절창이라 밤마다아기별뛰어놀던가로등아래 발그레한진달래처럼미소지으신할머니 수십계단아래경쾌하게굴러떨어진깡통하나 2023. 11. 27.
살며 뒤돌아서서 살며 뒤돌아서서 배용주 산다는 것은 가슴속에 탑 한단 올리는 거라네 한단 두단, 모양은 달라도 늘 세상 쪽으로 기울거나 욕심으로 쏟아지기도 하는 그때마다 쉼표 하나 품는 거라네 가슴 아파 힘들어도 질끈, 눈감고 울다가 바보처럼 웃어버리기도 하는 그때마다 불씨 하나 품는 거라네 살아간다는 것은 수다쟁이 헛소문이 아닌 탑 머리에 돌꽃 하나 피우는 거라네 2023. 11. 27.
안개를 만나다 안개를 만나다 배용주 할머닌 강둑에 앉아 지난겨울 적벽에 두고 온 아범 찾으며 그분이 오셨다고 한다 옷고름 늘어뜨린 채 염재를 넘을 거라 중얼거리신다 정오가 되도록 적벽은 안개옷을 벗지 못하고 빛을 껴안던 강물도 제 낯을 잃은 채 뒤엉킨 속만 꿀렁거린다 산 그늘 길어지고 별님도 오지 않는 밤이오면 누군가 어둠 속에서 강 비늘 세우는 소리 먹장을 벗어난 초승달이 적정산 절벽 위로 기우뚱 걸렸다 노을에 홍시는 익어가고 강물이 숨결을 고르면 우리는 억세 꽃 같은 방우리에서 안개를 만나고 있다 2023. 11. 27.
그녀들의 봄 그녀들의 봄 배용주 그녀는 오일장 번잡한 골목 폭설에 기운 담 밑에서 굼벵이처럼 움츠려 졸고 있다 곱은 손 은가락지 훈장처럼 빛나고 뒷산 밭 논두렁에서 뜯은 봄동들 ‘축개업국보약국’표 보자기 위에 밥상처럼 펼쳐놓았다 새벽 그늘 깊은 광주리에 냉이 달래, 봄나물 내오고 뻐근한 뼈마디 도닥거리며 개구리처럼 와글와글 쏘아보는 곱지 않은 눈초리에도 머리 흔들어 외면하는 뒤통수가 따가워도 진달래 꽃물처럼 파랑새 가슴처럼 소녀 같은 그녀의 손 가볍다 하필, 봄만 되면 오일장을 찾는 것인지 2023. 11. 27.
지루한 의자 지루한 의자 배용주 부산교통 영화여객 하덕정류소 처마밑에 할아버지 의자에 앉으셨다 먼눈으로 젖은 길 바라보시다 금세 그래그래 한 시절이여, 한 시절 고개를 끄덕이신다 태우시던 담배는 자글거린 입술을 떠나 바닥에 뒹굴고 간간이 오랜 기침을 쏟아 내며 쓴 잇몸만 중얼거리신다 다른 의자에 검정비닐봉지 얹히시고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신다 한여름을 등에 지고 모로 누운 평상같이, 대전발 영시 오십 분 노랫소리 들으며 빛바랜 털신 코에 비 들이친다 2023. 1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