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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에서 세상 속에서 배용주 나는, 얼마나 많은 씨앗을 뿌렸던가 얼마나 많은 새싹을 뽑아 잎사귈 길러냈던가 많은 꽃을 피워 열매를 거두는 꿈을 꾸었던가, 나는 나는, 꿈을 꾸며 끈질기고도 욕심 많은 창 너머 어둔 하늘을 본다 기쁜 그날들을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 흔한 사랑을 하고 가슴 아픔 날들을, 그날들을 잊길 꿈꾸겠는가, 나는 그러더라도, 사랑치 않고 사랑치 않고도 내 가슴이 불꽃을, 꽃눈들을, 키워 내기를. 또 얼마나 바람부는 언덕을 서성여야 하는가 2023. 11. 27.
흑백 텔레비전 흑백 텔레비전 고장 난 세상을 품은 채 네 다리로 버티는 이유 공중부양이라도 꿈꾸는 것일까 양쪽 미닫이 열고 전원을 켠다 다이얼을 아무리 돌려봐도 보이는 것이라곤 수만 개의 모래알갱이 사하라의 모래바람 휘몰아친다 텔레비전 뒤통수를 열었다 캄캄했던 세상이 드러났다 마취가 된 듯 파리 한 마리 미라처럼 고요하다 뚜껑을 열어둔 채 "우리 것은 때려야 말을 들어" 아버지께서 귀뺨을 때리시지만 마비된 세상은 회복될 기미 없이 애꿎은 정수리만 새까맣게 멍든다 2023. 11. 27.
이쑤시개 이쑤시개 배용주 너를 보면 나는 우울해 어디가 머리이고 어디가 발바닥인지 좀처럼 구분되지 않아 먼저 잡힌 쪽이 머리라 고집하며 가슴과 허리 깨 종아리와 허벅지 깨 그 어느 부위도 우울함 투성인 생의 점자들이 미세하게 읽히는 피 한방울까지 다 쏟아낸 힘줄들이 우우우우 피리소리로 달려드는 너를 보면 우울해 언젠가 식도처럼 좁은 읍내 시냇가 호박꼭지처럼 굽은 장터 골목에서도 훤히 내다 뵈는 나무 파릇한 이파리들 휘날림 속에서 매미가 한여름 청춘가를 불러대던 그 나무 어느 부근 살집인지 어느 부근 내장인지 짐작조차 못 할 너를 보면 문득 살아난 기억의 애벌레들이 날아오르곤 해 최소한 네게도 비장한 꿈이 있었겠지만 도끼가 창공을 서슴없이 지나기 전에는 아니, 일 획이 그어진 민족이기 전에는 아니, 굴욕의 침략을 .. 2023. 11. 27.
백련지에서 백련지에서 배용주 꽃 다 진 백련지에서 연잎 머리 조아리고 있다 얼어붙은 물밑에서 누군가와의 입맞춤인지 포리뤼 박새 날아와 앉으니 그 모습 하도 위태로워라 가냘픈 허리를 밟아도 부서지지도 주저앉지 않는 저 굽은 허리 속이 궁금하다 굽으면서까지 가두었던 얼음 뼈들 뽀득거린다 꽃피고 새 울면 허물어질 아치 뼈 이마가 무릎에 닿도록 내통하는 잠망경들 보인다 눈은 그치지 않고 나는 길을 잃었다 고치처럼 방 한 칸 빌려 살며 가슴속 청진기로 봄 익는 소리 듣는다 2023. 11. 27.
지문 지문 배용주 처음 남자가 손끝마다 젖은 언덕을 새긴 후로 여자의 후손은 아픈 뒤 발꿈치를 기억하며 원죄에 돌멩이를 던졌으리라 잊힌 유언들이 빗장을 부수고 육중한 겨울짐승에게 꽂힌다 생존의 창살이 팽팽한 문풍지에 꽃을 피운다 초록 그림자에 숨은 짐승의 머리카락이 갈라지고 선명해지면 질수록 손끝 밭고랑에도 윤기가 돈다 목마른 경계심이 만든 길 발아래 찰랑 상한 뒤꿈치의 안식이 역겨워 돌팔매질한다 팽팽해진 살 속에 숨겼던 문장 물 위에 테두리를 만들고 지문보다 선명한 물의 산맥이 솟구친다 어느 우주의 은하이던가 별의 산맥 바다의 파도 저수지의 돌멩이가 용감히 뛰어들어 소용돌이로 굳었던 동산 수많은 하늘의 암호들이 짐승의 동공 위로 떨어진다 내 엄지 밭고랑에도 물살이 세차다 2023. 11. 27.
공중에 달린 집 공중에 달린 집 배용주 볕 좋은 빈터에 목련꽃이 피었다 실금같이 갈라진 하늘에 겨울의 물꼬를 트고 가장자리부터 촛대전구 한 알씩 불 밝혔다 그 모습 하도 예뻐 손 그림자 비둘기 날갯짓을 기억하듯이 거꾸로 매달려 불 밝히던 백열등을 추억하다가 사십 년 전 기억처럼 나도 호롱에 성냥불을 댕긴다 종일토록 젖어 흐르던 하늘이 저녁에야 햇살 퍼지듯 환한 창문을 닫는다 동산 정수리 위에 백열등 하나 켜둔 채 새들이 날아간 쪽으로 이불 깔고 눕는다 마치, 그때같이 얼굴 붉도록 눈 비비며 나는 가슴 시린 꽃불을 피운다 끝자리마다 꽃 그림을 그려댄다 대문도 환하게 열어둔 집 이마를 들이밀고 피워댄 꽃집 손 모으고 기도하던 꽃잎들 어깨를 들썩이며 하얀 날갯짓으로 척척 내린다 촛대전구 한 알씩 깨져만 가고 덩그러니 필라멘트.. 2023. 1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