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33

나목처럼 나목처럼 배용주 단숨에 쓰러져도 좋을 일이다 내 살아 물길 찾는 여린 솜털 풀꽃 하나 바람막이 되었다면 달팽이 같은 느린 꿈꾸며 시원한 그늘 한 점 기울이고 착한 이 서넛 좋은 추억 하나 되었다면 싹이나, 꽃 하나 못 피어도 내 죽어 어느 산골 아궁이 쩔쩔 끓는 아랫목이 되리라 그러지도 못한다면 식솔 많은 개미나 만삭둥이 거미에게 방 하나 내어주면 될 일 나 하나쯤 단숨에 쓰러져 썩어들며 머리 한쪽 잃은 버섯 몇 키워도 좋을 일 2023. 11. 30.
지순한동행 지순한동행 배용주 그대 곁에서, 걸음을 맞추렵니다 빠르면 빠르게 느긋하면 느긋하게 한걸음 뒤에서 걸으렵니다 때로는 비바람치대도 묵묵히 곁을 지키다 보면 맑은 하늘도 보겠지 그대 곁을 떠날 수 없는 지지 않는 향기로 물들어 내 생의 지순한 사랑은 죽지 않는 불씨로 타올라 그대 삶에 미소가 되는 환한 봄날도 오겠지 포근히 팔을 맞잡다 보면 그대 어깨 가벼워지고 영영 곁에서 바라봅니다 하늘 보면 노을에 젖고 꽃 보면 꽃잎 되어 시선을 맞추렵니다 그대 곁에서, 2023. 11. 30.
꼭짓점 꼭짓점 배용주 아찔한 감나무 가지 끝 빈약하게 달린 꼭지 하나 햇살을 기억하고 바람에 몸을 굽히는 어머니 같은 얼굴 꽃 지고 열매 거두어도 끝까지 푸를 이름 세상 모든 꽃이 피고 지도록 놓을 수 없는 고집 생의 희로애락 맞닿은 꼭짓점 밥 한 공기 마지막까지 공손하게 드리고 싶어 빈약한 꼭지 위로 무수한 점 찍는다 2023. 11. 30.
노춘가 노춘가 배용주 산들에 꽃이 피고 봉산에 바람 일면 울 엄니 물질하던 바닷가에 고이 앉아 열아홉 곱디고우신 옛 기억에 물드시고 해풍에 별이 뜨고 선창에 물결 자면 아부지 소금 털던 염전 둑에 홀로 앉아 아흔둘 주름살마다 옛 추억에 잠기시네 서산에 지는 노을 울 엄니 얼굴 같고 동산에 뜨는 달도 울 아부지 눈빛 같아 퇴근길 막힌 도로야 마음만은 고향 바다 2023. 11. 30.
축대 축대 배용주 모로 쌓인 축대 위로 올망졸망 국화꽃 피어 있다 한 송이 머리에 꽂은 큰딸의 눈동자가 빛나면 꼭 다문 입술 바르르 떨며 허공으로 사라지는 버들잎 하나 축대 아래 웅크리고 앉은 그림자 셋 나란히 느린 시간의 붓대로무 언으로 그린 기억 츄리닝 바지 점퍼 운동화 끈이 풀린 아버지 방울무늬 리본 큰딸과 짤랑 귀고리 작은딸 태양은 벌써 십자가를 너머에 서고 바람이 꽃을 흔들 때마다 국화향기 가슴을 친다 아버지의 축대가 가볍기만 하다 2023. 11. 30.
사과를 쪼개며 사과를 쪼개며 배용주 서산에 뻐꾹새 울면 도둑고양이 까치발 디딤처럼 연둣빛 꽃잎 슬며시 풀어 올리며 따갑게 익어 갈 여름을 준비한다 탐스런 얼굴에 풋내가 돌면 냉수에 보리밥 휙 말아 넘기고 농부는 또 얼마나 잠을 못 이루며 잔별을 바라 볼 것인가 한 알의 사과 잘 쪼개면 연애를 잘한다는 웃기지 않는 유머를 흘리며 상큼함 입에 가득 물고 아버지의 좁은 터를 생각한다 2023. 11. 30.